입시상담
푸드스쿨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본문

 공사나 농사 등과 같은 정말 우연한 기회로 세상에 모습을 들어낸 유물, 유적들에 대한 시리즈물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번 글은 1편으로 삼국시대 이전까지의 6가지 사례를 다룬 글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흥수아이

 흥수아이는 당시 광산을 운영하고 있던 김흥수 씨의 제보를 통해 발견된 구석기인의 화석입니다. 그는 1982년 석회석 동굴 근교의 땅을 고르다 사람의 뼈 같은 것을 발견했고 사흘을 고민한 끝에 결국 제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흥수아이 발견 현장.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흥수아이가 발견된 흥수굴 >


 김흥수 씨의 제보를 통해 발굴 조사에 들어간 흥수굴은 외형 자체는 많이 파괴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완전한 사람의 뼈와 석기, 동물화석 및 식물자료가 발견되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람 뼈와 국화꽃 가루가 가장 큰 주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당시구석기인들의 매장 및 장례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흥수아이 1호 출토 모습.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출토된 흥수아이 >


 흥수아이는 네모꼴 판자돌 위에 두께 10cm의 고운 흙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 다시 시신을 고운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네모꼴 판자돌을 덮은 형태로 발굴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에도 일정한 매장 절차와 순서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흥수아이 매장 복원도.pn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흥수아이 매장 복원도 >

 한편 엉치뼈 주위에는 국화꽃 가루가 덩어리 진 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는데요 이는 흥수아이의 매장이 이루어진 시기가 국화꽃이 피었던 계절이었다는 것과 애도의 뜻으로 국화꽃을 뿌렸던 일종의 장례행위, 의식이 있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와 같이 흥수아이는 당시 한반도에서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장례의식에 관해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이융조, 두루봉 연구 30년 / 네이버 지식백과

 

2. 전곡리 주먹도끼

 전곡리 주먹도끼는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이었던 보웬 씨에 의해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는 1977년 한국인 애인과 한탄강으로 데이트를 나왔다가 우연히 돌 하나를 발견, 입대 전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던 경험에 비추어 발견한 돌이 범상치 않은 돌임을 직감하고 제보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렌 보웬.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발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보웬 >


 그의 제보를 통해 발굴 조사에 들어간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는 다양하면서도 많은 양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바로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석기의 존재 유무로 동아시아(찍개 문화권)와 아프리카ㆍ유럽(주먹도끼 문화권)으로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


전곡리 발굴.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 모습 >


 주먹도끼의 존재 여부로 동서양의 문화권을 나누고 나아가 서양의 문화적 우열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써 자주 제시되어 왔던 모비우스의 학설은 전곡리를 시작으로 이후 중국, 몽골 등 동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폐기되고 맙니다.


모비우스 학설.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의 유무에 따라 문화권을 나누었던 모비우스 학설 >


 같은 전곡리 주먹도끼의 발견은 당시 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모비우스 학설이 폐기되는 계기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동아시에서 발견되는 아슐리안형 석기들의 시작점이란 점에서 매우 기념기적인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 유용욱, 임진-한탄강유역 주먹도끼 연구의 성찰과 전망

 

3. 제주 고산리 유적

 제주 고산리 유적은 1987년 고산리 주민이었던 좌정인 씨가 흙을 채취하기 위해 땅을 파다 우연히 석창과 긁개를 발견, 제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초기 신석기 유적지입니다.


신고된 글개와 찌르개.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제보된 석창과 긁개 >


 주민의 제보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지표 조사 및 발굴 조사를 통해 주거지를 비롯한 수 백개의 수혈유구와 더불어 수 만점에 달하는 토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토기와 석기들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발굴지 전경(2014).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2014년 당시의 발굴지 전경 >


발굴 장면(2016).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2016년도 당시의 발굴 모습 >


 먼저 토기의 경우 한반도 내륙 내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던 새로운 형태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고산리식 토기’로 불리게 된 이 토기들은 식물의 줄기와 같은 식물성 섬유질이 혼합해 만든 토기로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제주도에서만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산리식 토기.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고산리식 토기, 토기에 보이는 선이 식물성 섬유질이 혼합되었다는 증거 >


 ‘고산리식 토기’의 발견은 빗살무늬 토기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라는 기존의 견해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빗살무늬 토기가 지금으로부터 대략 8천년 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고산리 유적에서 발견된 ‘고산리식 토기’는 이보다 앞선 약 1만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토기와 더불어 같이 발견된 석기들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 문화가 확인되는 석기들이 초기 신석기 시대의 석기 문화가 확인되는 석기들과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토된 유물들.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이와 같은 제주 고산리 유적의 발견은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시작을 1만 2천년 전까지 끌어올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의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국사편찬위원회, 한반도의 흙 도자기로 태어나다 / 제주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제주 고산리 유적)

 

4. 울주 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지역 주민의 제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고래 사냥과 관련된 거대한 바위그림입니다. 암각화의 발견은 1971년 문명대 등 3명이 이전 해에 우연히 발견한 천전리 각석을 답사하던 중 반구대에서 1km쯤 아래 개울가에 호랑이 그림이 있다며 조사해 달라는 지역 주민의 제보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반구대 발견 당시 1.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이후에 이루어진 정밀조사 결과 암각화에서는 총 353점의 그림들이 확인되었는데 사람을 표현한 인물상, 바다와 육지의 동물들을 표현한 동물상, 수렵이나 어로와 관련된 도구상 등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것은 바로 고래와 관련된 부분이었습니다.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는 동물그림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래의 종이 구분 가능할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새끼를 업고 있는 어미고래나 물 위로 도양하는 모습 등은 고래의 생태적 특징을 표현한 그림들은 당시 사람들이 고래에 대한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암각화 고래.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암각화에는 여러 사람이 통나무배를 타고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과 잡은 고래를 매달고 귀항하는 모습, 그리고 사냥에 사용된 도구 등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청동기 시대 암각화 유적과 더불어 인류의 초기 고래 사냥과 관련된 정보를 담은 기록이란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반구대 고래 사냥.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고래 사냥 장면 >

 이와 같은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은 당시 신석기 인들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 문화콘텐츠닷컴(울산 반구대 암각화배) / 우리역사넷(울산 반구대 암각화)

 

5. 농경문 청동기

 농경문 청동기는 1970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뒤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유물로 정확한 출토지나 출토상황이 알려진 유물은 아닙니다. 다만 대전 어딘가에서 도굴되었을 것으로만 추측되고 있을 뿐이죠.


농경문 청동기.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농경문 청동기는 그 자체에 새겨진 문양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청동기 유물에 새겨진 문양들은 보통 제사를 주관할 때 사용하였던 의기류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농경문 청동기에는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의 모습이나 농사짓는 사람의 모습과 같은 매우 사실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양이 새겨진 청동기의 존재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방패형 청동기2.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대구 괴정동 유적에서 출토된 방패형 동기, 농경문 청동기의 원형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


 농경문 청동기에는 앞뒷면 모두에 각각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면에는 밭을 일구고 있는 남자와 항아리에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인물이 새겨져 있고 고리가 달린 또 다른 한 면에는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새가 새겨져 있는 모습이죠. 이를 바탕으로 농경문 청동기는 한 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빌며 행했던 종교 의식과 관련이 있는 의기였을 것으로 현재 보고 있습니다.


농경문 청동기1.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농경문 청동기2.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이처럼 농경문 청동기는 당시 발달된 청동기의 제작 수준과 더불어 농경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사회의 종교 의식과 관계가 깊은 의기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유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농경문 청동기)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농경문 청동기)

 

6. 화순 대곡리 유적

 1971년 화순 대곡리에 살던 구재천 씨는 배수로 작업 도중 뭔가 푸른빛의 금속 물건들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해당 물건들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침 마을에 나타난 엿장수에게 이를 팔아 넘겼는데 물건을 받아든 엿장수의 눈에는 해당 물건들이 뭔가 다르게 보였나 봅니다. 엿장수는 고심 끝에 전남도청에 신고하였고 이후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일부 파괴되긴 했지만 적석목곽묘 형태의 무덤 1기가 확인되었습니다.

 

 구재천 씨가 발견하여 엿장수에게 넘긴 금속 물건은 총 11점의 청동유물들로 한국식 동검 3점, 청동도끼 1점, 청동새기개 1점, 잔무늬거울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유물들은 모두 한국식 동검문화를 대표하는 것들로 이러한 유물들이 일괄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72년 국보 제 1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화순 대곡리 유적지.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2008년 추가 조사로 발견된 청동검 2자루까지 해서 모든 부장품이 모인 모습 >

 해당 유물과 유적의 중요성 때문인지 2008년 화순 대곡리 유적에 대한 재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71년 조사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동검 2점이 이때 추가로 발견되면서 37년 만에 해당 무덤의 모든 부장품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발굴현장.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재발굴 현장의 모습 >


추가 수습된 청동검.jpg 우연히 발견된 역사의 흔적들 (1)
< 추가로 수습된 청동검 >

 이와 같은 화순 대곡리 유적의 발견은 당시 국보로 지정된 청동유물 가운데 출토지가 뚜렷하게 확인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발견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청동기 유물들의 경우 대부분이 도굴 등을 통해 유출된 터라 출토지가 뚜렷하지 못했거든요.

 

 또한 우리나라 후기 청동기 시대, 또는 초기철기시대에 있었던 강력한 지배자의 출현, 계급의 위계화, 제정일치 등의 당시 사회 변화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단서들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순 대곡리 유적)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오늘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처음에는 10가지 사례를 다루어 볼려고 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기도 하고(지금도 긴데) 무엇보다 막상 글을 써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더라구요...(대략 8시간..) 그래서 추려서 6가지 사례만 소개해 봤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삼국시대의 유물, 유적과 관련된 사례들을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글 읽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

Tx8vL4902020. 4. 26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